천마총
경상북도 경주시 첨성로 140 (황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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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천마총) 소개

신라 고분들이 모여 있는 대릉원은 경주 시내 한가운데 약 12만 6,500㎡의 너른 땅 위에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30기의 고분들이 자리 잡고 있다.

옛날무덤들 속에는 무덤 주인과 함께 수많은 껴묻거리(부장품)가 같이 묻혀 있고 때로는 무덤 주인의 시종이나 노비들이 함께 묻히는 순장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대릉원은 신라의 왕권강화가 이루어졌던 시기인 4세기에서 6세기 초까지의 무덤이라고 볼 수 있다. 천마도의 '천마총'과 대릉원이라 이름 붙이게 된 댓잎군사의 전설 이야기가 재미있는 '미추왕릉', 경주에서 가장 큰 무덤이면서 금관이 발굴된 '황남대총' 등이 모여 있다.

1970년대 정부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98호분(황남대총)을 발굴한 뒤 내부를 복원하여 교육 및 연구 자료로 삼고자 했으나 그와 같은 큰 고분을 발굴해본 경험이 없는 터라, 그보다 작고 가까이에 있는 155호분을 발굴하여 경험을 쌓으려 했던 것이 지금의 천마총이 되었고 이때 모두 1만5천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경주의 신라무덤들을 능, 총, 묘로 구분하는데, ‘미추왕릉’처럼 어느 왕의 무덤 인지 확실 할 때는 왕의 이름을 붙여 '능'이라 하고 '총'은 천마총과 같이 발굴 후, 출토된 유물의 보존 가치가 높지만 누구의 무덤인지 모를 때, '묘'는 '김유신묘'처럼 귀족이하 일반인들의 무덤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래 된 역사일수록 역사서 속에서도 기록되지 않은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있기 마련인데, 무덤들은 책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알려주기도 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입고, 먹고, 잤는지 같은 생활상의 지식창고 역할을 하고 있다.

경주 미추왕릉 (舊 신라미추왕릉)

담장으로 둘러진 큰 무덤의 주인은 바로 신라 13대 왕을 지냈던 미추왕으로 신라의 첫 번째 김씨 왕이다. 재위 기간 동안, 백제의 침입을 막아 내고 농업을 장려하는 등 국력 신장에 힘써, 죽은 후에도 신라인들에게 성군으로 사랑받은 왕이다.

둥글게 흙을 쌓은 형태로 높이 12.4m, 지름 56.7m이다. 경주시내 평지고분 가운데에서도 대형분에 속하며, 내부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일 것으로 추정되고 능 앞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혼이 머무는 자리인 혼유석(魂遊石)이 있다.

대릉원은 '미추왕을 대릉에서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유래된 것이며, 대나무가 병사로 변하여 적군을 물리쳤다는 전설에 따라 '죽현릉(竹現陵)' 또는 ‘죽능'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능 앞의 대나무 숲이 그 설화를 떠오르게 한다.

특이하게 담장을 둘러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으며 조금 떨어진 무덤 앞쪽에는 위패를 모신 숭혜전(崇惠殿)이 있다.

천마총

대릉원의 고분군 중 유일하게 공개하고 있는 155호 고분 천마총은, 옆에 위치한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위해 시범적으로 발굴한 곳인데, 당시 기술로는 황남대총 같이 거대한 규모의 무덤을 발굴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1973년 발굴 과정에서 부장품 가운데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가죽 같은 것을 말의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가 출토되어 ‘천마총(天馬塚)’이 되었는데, 최근 이 천마가‘말’을 그린 것이 아니라 ‘기린’을 그린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천마총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으로 추정되는데 금관, 금모자, 새날개 모양 관식, 금 허리띠, 금동으로 된 신발 등이 피장자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다.

특히 천마총 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다. 실제 유물들은 경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니 꼭 한번 들려 보길 권한다.

천마총과 부장품들

신라의 대표적인 무덤형태인 천마총은 목관을 안치하고 그 위에 나무 덧널을 짠 후 주위와 윗부분을 돌로 쌓고, 물이 새어들지 못하게 진흙을 덮어 다지고 다시 그 위에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들어 마무리 한 돌과 덧널을 사용해 만든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발굴 당시 봉분은 마치 화산분화구처럼 움푹 들어 가 있어서 봉분에 흙을 채워 봉긋하게 복원해 무덤형태를 알 수 있게 복원한 모습의 내부를 볼 수 있게 유리전시관 안의 썩은 목관은 그대로 둔 채 덧널만을 복원해 목관내부를 볼 수 있게 공개하고 있다.

천마도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신라의 대표적인 회화작품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아 국보 제207호로 지정되었다.

긴 혀를 내밀고 꼬리를 추켜세워 마치 하늘을 나는 듯 묘사된 천마가 죽은 사람을 하늘 세계로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음을 짐작케 해주는데 천마도의 동물이 말이 아니라 이마에 뿔이 있는 상상속의 동물인 기린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천마총 금관은 전형적인 신라금관의 형태로 앞면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이 세 줄이 솟아 있고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이 두 줄로 그리고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에는 생명력을 상징하듯 돋아나는 싹 모양과 태아형태의 곡옥 장식들이 달려 있다.

금관 옆으로 금 장신구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새가 날개를 활짝 핀 모양의 화려한 금장식은 신라 사람들이 쓰는 모자에 꽂는 것으로 추측되며, 금 허리띠에는 물고기와 곡옥, 철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숫돌과 집게 모양을 한 많은 장식들이 달려 있다.

각 모양마다 당시 신라에서 중요시되던 상징적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추측하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다.

황남대총

황남대총은 대릉원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고분 중 가장 큰 무덤인데, 동서 길이가 80m, 남북 길이가 120m, 높이가 23m로, 신라 고분 가운데 가장 크다.

무덤은 하나가 아니고 둘이 서로 붙어 있는 쌍봉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그 모습이 꼭 표주박 같다고 하여, 표형분 무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두 개의 무덤이 하나로 만들어진 무덤을 부부 무덤으로 추축하고 있다.

무덤을 붙여 놓은 이유는 황남대총도 천마총과 같이 돌무지 덧널무덤이기 때문에 먼저 죽은 사람의 무덤을 다시 파낼 수 없어, 바로 옆에 무덤을 이어 만들게 된 것으로 추정한다.

발굴 당시, 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북쪽 무덤에서는 금관을 비롯한‘부인대’라는 여자 허리띠와 목걸이, 팔찌, 곡옥 등의 장신구가 나왔고, 남쪽 무덤에서는 남자의 뼈와 금동관 과 무기 위주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한편 흥미로운 것은 남쪽 무덤에서 남자의 뼈와 함께, 15세 정도의 여자의 뼈 조각이 발견된 것을 보아 무덤의 주인과 함께 여자가 순장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신라에는 지증왕 이후 순장을 금지했다는 기록과 위의 사실을 통해 신라의 순장풍습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발굴 작업은 1973년 7월부터 1975년 10월까지 연인원 3만 2,800명이 동원되었는데, 북분에서는 금관을 비롯한 장신구, 무기, 토기류가 3만 5,000여 점, 남분에서는 무기가 대부분인 2만 2,0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으며 서역을 통해 신라에 수입된 것으로 여겨지는 유리 제품도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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